여자의 감성으로/♣넓은 세상 좁게 보기

[스크랩] [펌]태종 이방원이 충녕대군(세종)을 선택한 이유?

예쁜 수채화 2008. 2. 20. 10:50

이날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14년을 기다렸다
[태종 이방원 182] 엽색행각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구름 흘러가는 구름에 이색적이게 물음표가 그려졌다. 사진은 경복궁 민속 박물관입니다. ⓒ 이정근

충녕대군을 세자로 낙점한 태종은 대명(對明) 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동지총제(同知摠制) 원민생으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으로 떠나게 했다. 조선왕의 등극과 세자책봉은 명나라의 고명을 받아야 한다. 명나라에서 거부하면 일이 꼬이게 된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려면 많은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게 된다. 정치력도 실추한다.

 

태종이 원민생을 택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신으로 명나라를 드나들던 원민생이 밀무역으로 말썽을 부려 의금부에 투옥된 일도 있었지만 태감(太監) 황엄과 돈독한 사이였다. 황엄은 비록 명나라 조정의 내사(內史)였지만 조선에는 총독처럼 군림했다. 처녀주문사(處女奏聞使)로 조선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조선의 대명 창구였다. 태종이 원민생의 인맥을 활용하여 명나라 문제를 넘으려는 것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황엄을 구워 삶아라

“신(臣)의 장자 제(禔)를 영락 3년에 주준(奏准)을 받아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장성하였는데도 행동하는 바가 후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부득이 외방에 내보내어 안치하였습니다. 제2자 보(補)는 자질이 유약하여 중임을 맡기기가 어렵고 제3자 휘(諱)는 성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학문을 좋아하여 한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촉망하니 후사로 세우기를 청합니다. 신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삼가 주문(奏聞)합니다.”

명나라에는 황제가 있고 조선 왕은 신하다. 명나라와 조선 관계가 그렇다. 슬픈 일이지만 현실이다. 하지만 사후 추인을 받으면서 사전 고명을 요청하고 있다. 원민생을 믿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대한 자신감이다. 원민생을 명나라에 파견한 태종은 상호군(上護軍) 문귀와 내관 최한을 전지관(傳旨官)으로 한양에 보내어 양녕에게 폐위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임금의 특명을 받은 문귀와 촤한이 세자전에 도착했다. 개성의 소식을 접한 세자전은 술렁거렸다. 한양에 머물고 있던 대소신료들이 세자전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서연을 간청하던 서연관들과 대간들이 세자전 앞뜰에 부복했다. 양녕도 무릎을 꿇었다.

 

“저부(儲副)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대의(大義)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일에는 하나의 대개(大槪)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리에 합당하도록 기대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 제(禔)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가 어리기 때문이라 하여 장성하면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20이 넘었는데도 군소배(群小輩)와 사통하여 불의한 짓을 자행하였다. 지난해 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이었나? 제(禔)가 이에 그 허물을 모조리 적어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하여 스스로 뉘우치는듯하였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간신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 다시 전철을 밟았다.

내가 부자의 은의(恩誼)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제는 이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憤然)히 상서하였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여 전혀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다.

정부·훈신·육조·대간·문무백관이 합사(合辭)하고 소장(疏狀)에 서명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종사만세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여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 즉시 저이(儲貳)를 세워 인심을 정하소서’ 하였다.

또한 ‘충녕대군은 영명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의 여망에 부합합니다’ 하였다. 내가 부득이 제(禔)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대군을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었겠느냐? 중외의 대소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 <태종실록>

 

난 기필코 살아남아 그날을 기다리겠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세자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 미동하는 이 없었다. 부복한 신하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뜨락엔 냉기가 흘렀고 부는 바람은 싸늘했다. 세자를 가르치던 서연관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자신들에게 떨어질 책임추궁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최한이 대독한 부왕의 유시(諭示)를 듣는 동안 양녕은 담담했다.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평온했다. ‘올 것이 왔다’라기보다도 ‘기다리던 것이 왔다’라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늦었다는 느낌이었다. 보는 이 없다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하지만 초상집 분위기의 세자전에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었다. 양녕은 즉각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내관 최한의 유시가 끝나자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어둠이 걷히고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이때, 세자전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까치 한 쌍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푸른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도 날고 싶다. 너희들은 백악산과 삼각산을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지만 나는 아직 날지 못한다. 하지만 야밤에 담장을 뛰어넘어야 했던 대궐을 백주 대낮에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나는 이날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14년을 기다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하지 않더냐? 얼마를 더 기다려야 너희들처럼 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기필코 살아남아 그날을 기다리겠다.’

 

그랬다. 양녕은 6년 후 부왕 태종이 훙(薨)하면서 서서히 날기 시작하여 왕위에 오른 아우 세종을 먼저 보내고 문종, 단종을 뛰어넘어 1462년 그러니까 세조 8년에 향년 6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스스로의 다짐을 지킨 것이다.

또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앞서가는 구름에 어리의 얼굴이 보였다. 보고 싶은 마음에 자세히 바라보니 금세 지워졌다. 뒤에 가는 구름에는 자신 때문에 죽은 구종수와 이오방, 그리고 진표와 이귀수의 얼굴이 만들어졌다 흩어졌다.

 

‘너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너희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너희들을 필요로 했다. 내가 미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숨 막힐 것 같은 대궐을 벗어나려면 도리가 없었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가 살인을 하겠느냐? 도둑질을 하겠느냐? 세자의 몸으로 저잣거리에 나가 시정잡배들과 싸움질을 하겠느냐?

내가 좋아하고 즐기면서 부왕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엽색행각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성색에 빠졌다고 조롱하고 이기적이라고 비웃어도 그것이 가장 실속 있고 신속하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너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이 왔다고 생각한다. 고맙다. 편히 잠들어라.’

 

양녕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자를 폐위당한 것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이러한 양녕을 지켜보던 주위의 신하들은 양녕이 부왕의 세자 축출에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장자는 신앙이었고 택현은 현실이었다
[태종 이방원 183] 정치인은 미래에 베팅한다

여름날의 불볕이 세자전을 달구었다. 뜰에 부복한 양녕의 얼굴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세자를 벗어난 기쁨의 눈물인지 자신을 위하여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고뇌의 땀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임금의 유시가 끝났으나 양녕이 일어나지 않으니 다른 신하들도 일어나지 못했다. 양녕의 뇌리에는 자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구종수, 관직에 있는 자가 품위 없게 건들거리긴 했지만 의리 하나는 일품이었지. 너의 등을 타고 창덕궁 담장을 넘을 때, 숙위군들이 달려오자 종 4품 체신에 영인(伶人-광대) 이오방과 이법화를 넘겨주고 넌 군사들에게 잡혔지. 끌려가 물고를 당했지만 너와 나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 무사했지. 주군을 대신하여 감옥에 간 녀석을 보는 것 같았다. 넌 그거 알았느냐?

숙위군들이 너를 순군옥에 보내지 않은 것은 너의 주먹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지들의 근무태만이 탄로날까봐 안 보낸 거야. 널 순군옥에 넘기면 지들의 목이 달아나거든. 몰랐지? 상처투성이 얼굴로 돌아와 군사들을 패주고 돌아왔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허풍만 없다면 괞찮은 녀석이었는데… 왈패 같은 녀석. 그래도 넌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다.

이오방, 사내 손이 여인네 손처럼 그리 생겨도 되는 거냐? 섬섬옥수 같던 너의 손으로 타던 가야금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어 가슴 아프구나. 진표, 넌 어찌 내 취향을 그리도 잘 알았느냐? 역시 넌 채홍이 천성이었나 보다. 여자를 보는 안목이 가히 천재적이었어. 내가 인정한다. 이귀수, 넌 비록 버들가지처럼 흐늘거렸지만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넌 그래도 주군을 모실 줄 아는 속 깊은 남자였다.'


그래도 괞찮은 사내들이었는데, 안타깝다

양녕의 세자 전성시절. 참외 서리하던 악동들처럼 고락을 같이했던 동무들이다. 지금은 처형되어 다시 볼 수 없지만 양녕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사람들이다. 실록에는 세자를 불의로 이끈 간녕(奸佞)한 무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양녕의 가슴에는 잊지 못할 얼굴로 남아 있었다.

이귀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오며 방유신이 떠올랐다. 더불어 서사민이 생각났다. 방유신은 예쁜 손녀딸을 두었다는 이유 하나로 의금부에 끌려가 곤장 100대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노인네였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양녕을 도강(渡江)시켜 주고 날벼락을 맞은 양화진 나루터 도승관(渡丞官)이 서사민이다.

양녕에게 바칠 여자를 물색하던 진표가 최학과 옥세침을 놓아 자색이 고운 방유신의 손녀딸을 찾아냈다. 진표와 이귀수의 충동질에 귀가 솔깃해진 양녕이 이귀수에게 이불보(寢袱)를 짊어지게 하여 방유신의 집에 가서 자고 새벽녘 오고(五鼓)에 세자전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진표와 이귀수는 참(斬)에 처해지고 방유신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적몰당했다. 진표는 내섬시 서방색(四房色)으로 세자의 채홍사를 자임했던 인물이다. 평양기생 소앵을 필두로 양녕의 엽색행각의 길라잡이는 진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전소친시(小親侍) 이귀수는 본래 김한로의 가노로서 숙빈의 유모 소생이다.

판사 이문관은 경기감사 이관의 형으로 세자의 끈을 붙잡고 부자가 함께 떠보려다 추락하면서 서사민에게 날벼락을 안겨주었다. 세자를 몰래 불러내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철관포(鐵串浦)에서 매사냥을 한 이미는 이문관의 아들이다. 이 사건으로 이문관 부자는 부평에서 압송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양화진 나루터에서 세자를 건너 주고 보고하지 않은 양화도승(楊花渡丞) 서사민도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양녕이 흘린 웃음, 세상을 비웃었을까?



세자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신하들의 눈에 양녕의 웃는 얼굴이 포착되었다. 순간이었다. 지엄한 임금에게서 세자 폐위라는 문책을 당한 양녕이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웃는다는 것은 신하들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양녕이 미소를 흘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세자의 지위를 잃는 것이 어이없어서가 아니었다. 불경스럽게 부왕의 조치가 가소로워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귀수가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던 광경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핏 흘린 미소가 신하들 눈에 보인 것이었다. 훗날 이것이 와전되어 양녕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졌다.



세자를 폐하자고 주청한 백관들의 장소(章疏)가 양녕에게 전해졌다. 소를 받아든 양녕은 세자 폐위를 주청한 신하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면면들이 알 만한 이름들이다. 한 때는 사람을 놓아 선물을 보내오고 가까이 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끼어 있었다.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구나."



생각나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틀림없는 말인 것 같았다. 등극을 기다리는 세자와 권력의 양지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바람이고 구름인 것만 같았다. 바람이 구름을 모으고, 구름이 모이면 바람이 불고, 속절없는 것이 권력인 것만 같았다.



한편, 개성에서는 세자를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빈객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왔다.



"저부(儲副)를 세우고 서연을 설치하는 것은 도의를 강명하여 바른 데로 보도하고 사악을 들이지 않으려는 소이입니다. 지금 유도(留都)한 빈객 성균대사성 조용, 이조참판 탁신과 서연관이 보도한 공효가 없어 저부로 하여금 불의한 짓을 자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저부가 상서할 때 만류하는 말도 없었으니 유사(攸司)에 내려 죄를 묻고 어리라는 계집은 먼 지방에 내쳐서 화(禍)의 싹을 막으소서."



한양에 상주하고 있던 빈객들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이어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해에 저부를 세워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문신으로 요좌(僚佐)를 겸하여 좌우에 둔 것은 미리 기르고 평소에 가르쳐 그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날마다 선한 데로 나아가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효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빈객(賓客) 조용·변계량·김여지·탁신, 보덕(輔德) 조서로, 필선(弼善) 유직·박서생, 문학(文學) 우승범, 사경(司經) 유구사·유승유, 정자(正字) 이사맹 등이 바른 심술과 밝은 도학으로 진강하지 아니하고 그저 예예 하고 무조건 따라서 세자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게 하였으니 서연관 등은 그 직첩을 거두고 안율(按律)하여 후래를 경계하소서."



"빈객(賓客)은 논하지 말라. 서연관은 파직하고 보덕(輔德) 이하는 관직을 파면하라."



서연청 상주 빈객 조용과 탁신은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다. 세자가 폐위되는 초유의 상황에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태종도 일벌백계 차원에서 모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허나 변계량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변계량을 제외하고 처벌할 수 없었다. 변계량과 김여지를 구명하려는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과 탁신은 화를 면했다.



태종이 신봉하는 장자는 과거형이고 택군은 미래형이었다



영의정 유정현이 양녕과 숙빈을 비롯한 가속(家屬)을 춘천에 내치도록 청했다.



"성녕대군이 졸(卒)하면서부터 중궁이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다. 제(禔)를 가까운 고을에 두기를 청하여 소식이라도 자주 듣기를 바라고 있다."

"경도(京都)에 머물러 둘 수는 없습니다."


유정현이 반대했다.



"폐 세자 이제를 광주에 안치하라."



태종은 영의정의 청을 따랐다. 폐 세자 양녕에게 유배령이 떨어졌다. 양녕을 경기도 광주에 안치하라 명한 태종은 문귀와 최한을 한양에 파견하면서 배치관(陪置官)으로 첨총제(僉摠制) 원윤을 임명했다. 유배지까지 차질 없이 호송하라는 것이다. 태종은 문귀를 별도로 불렀다.



"경은 종실에 인척 관계가 있으니 세자가 경을 본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전하라."



말을 마친 태종은 목이 메었다. 가느다란 통곡 소리도 들렸다. 아들을 내치는 부왕. 인간적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세자를 쫓아내는 임금. 군주로서 통석의 감이 있었을 것이다. 장자승계를 신봉했던 태종이 현군을 택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허나, 태종에게 장자는 신념이었고 택현은 현실이었다.

유일신을 신봉하는 기독교 장로가 불전 앞에 두 손을 모으듯이 태종에게 있어서 장자는 신앙이었고 택현은 정치행위였다. 정치는 미래지향적이다. 정치인은 미래에 베팅한다. 과감히 걸수록 위험 부담이 크다. 가시적인 결과로 심판받고 역사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태종이 신봉하는 장자는 과거형이고 택군은 미래형이었다.


2007.10.26 08:54 ⓒ 2007 OhmyNews




28의 숫자에 숨어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태종 이방원 184] 도성을 떠나는 양녕

세자 폐위 후속 조치를 착착 진행하던 태종은 폐 세자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세자 충녕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 또한, 충녕의 부인 심씨를 경빈으로 봉(封)했다. 심온의 딸이 세자빈이 된 것이다.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조판서 직에 있던 심온. 딸이 세자빈이 된 가문의 영광이 죽음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신은 물론 아무도 몰랐다.



이어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유정현을 영돈녕부사로 보내고 한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세자 축출 작업에 총대를 멘 유정현을 쉬게 한 것이다. 예문관 대제학이던 변계량을 예조판서로, 김여지를 판한성부사로 내렸다. 문책성 인사다.



서연청도 확대 보강했다. 좌의정 박은을 세자사(世子師)로 삼고, 옥천부원군 유창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하는 한편 유관을 예문관대제학 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맹사성을 공조판서 겸 세자우빈객으로 삼았다. 좌빈객은 변계량이 있던 자리다. 맹사성의 세자우빈객 임명으로 세종시대를 열어갈 떠오르는 샛별이 등장한 것이다.



태종으로부터 폐 세자 양녕을 광주에 안치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단의 무리들이 한양에 입성했다. 세자전을 접수하기 위해서다. 총책 문귀를 앞세우고 서전문을 통과한 일행은 창을 꼬나쥔 군사들을 앞세우고 운종가를 행진했다. 때아닌 군사들의 출현에 도성의 백성들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아들 쫓아내면서 웬 군사들이야?"
"그러게 말이야, 폐 세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꼭 점령군 같아…."



첨총제(僉摠制) 원윤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세자전으로 들이닥쳤다. 놀란 부녀자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우왕좌왕했다. 군사들은 창을 앞세우고 눈알을 부라렸다. 살벌했다. 겁에 질린 이들을 세자빈 거처로 몰아넣어 라고 원윤이 소리를 질렀다. 군사들이 닭 몰이하듯 가속들을 숙빈 거처로 몰아넣었다. 세자전 뜰에 양녕 혼자 부복했다. 문귀가 목에 힘을 주며 전교(傳敎)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말, “네가 사랑하던 여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너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백관들이 너를 폐(廢)하자고 청했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자리를 사양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내가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이다.



효령대군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대군은 고명(高明)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의 청으로 세자를 삼았다. 군신(群臣)이 모두 너를 먼 지방에 안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중궁이 가까운데 두기를 원하여 너를 광주에 안치하는 것이다. 비자(婢子)는 13구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비품은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무방하나 네가 가졌던 탄궁(彈弓)은 전(殿)에 두라." - <태종실록>



전교가 끝났다. '탄궁을 두고 가라'는 말은 까칠하게 들렸고 '네가 사랑하던 자들은 모두 거느리고 살라'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렇다면 부왕께서 어리를 허락하셨단 말인가?' 뛸 듯이 기뻤다. 하마터면 기쁨의 미소를 흘릴 뻔했다.



'부왕에게 죄를 짓고 귀양 가는 몸. 아무리 좋아도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스스로 다짐한 양녕은 매무새를 고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엎드려 있던 양녕이 머리를 들었다.



"옛날에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다가 금일에 죄를 얻었다."



말을 마친 양녕은 북쪽을 향하여 삼배(三拜)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를 휘둘러 본 양녕은 미련 없이 세자전을 떠났다. 숙빈과 가속들이 뒤를 따랐다. 문 밖에서는 인의가 말을 대기하고 있었다. 말에 오른 양녕은 앞으로 나아갔다. 창을 든 군사들이 앞뒤를 에워쌌다. 호위가 아니라 호송이다.






▲ 하마비. 종묘에 이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렸다.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기 위해서다. 종묘 외대문 앞에 있다.
ⓒ 이정근 종요


양녕의 유배행렬이 정선방 다리에서 동쪽으로 꺾었다. 흥인지문 가는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종묘에 이르렀다. 창덕궁 담장을 뛰어넘어 여자를 만나러 가는 비밀 통로였으나 태조를 비롯한 조상들을 모신 곳이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이 없다.



"말을 잠시 멈추어라."



하마비(下馬碑)에서 내린 양녕은 외대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전에 들어가 조상을 배알하고 싶었지만 귀양 가는 죄인의 몸으로 출입할 수 없다.



삼배를 마친 양녕이 머리를 들었다. 창엽문(蒼葉門) 편액이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이 경복궁 명칭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으면서 창엽문도 작명했다고 들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에서 경복(景福)이란 명칭을 따왔다고 말하면서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근면하게 정사를 살피라는 뜻으로 근정전(勤政殿) 이름을 지었다는 정도전이 창엽문 이름을 작명하면서 아무런 뜻도 없이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엽문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창엽문 편액을 바라보았다. 근정과 같이 직설적인 뜻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한자(漢字)는 표의문자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글자를 풀어 보았다. 창(蒼) 자를 해자(解字)하니 艸, 八, 君이 나왔다. 숫자는 스물여덟이었다. 엽(葉) 자도 풀어 보았다. 艸, 世, 十, 八이므로 똑같이 28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숨은 그림을 찾은 기분이었다.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28이다.'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한 양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28에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없었다. 창엽(蒼葉)이라는 글자 속에 숨어 있는 해자와 합자(合字)의 비밀.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 창엽문. 종묘 외대문. 창엽문이라는 현판은 행방이 묘연하다
ⓒ 이정근 창엽문



"저하, 갈 길이 머옵니다."


문귀가 재촉했다. 비록 유배 가는 폐 세자이지만 저하로 깍듯이 예우했다. 양녕이 말에 올랐다.



양녕이 풀지 못한 창엽문(蒼葉門)의 비밀. 28이라는 숫자를 숨겨놓은 정도전의 의도를 놓고 훗날 설(說)이 분분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위패가 종묘에 봉안된 것을 마지막으로 종묘 봉안이 끝났으므로 조선 왕조가 28위(位)라는 설이 그 하나다.



마지막 왕손 이구가 최근에 영면하였으니 조선 왕조는 28세(世)라는 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하여 일제가 왜곡했다는 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그 이름을 지은 정도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600년 전 인물 정도전이 진정 조선왕조를 28세로 예측했다면 그의 예지력에 탄복할 뿐이다.



"경은 무슨 일로 따라오는가?"


양녕이 문귀에게 물었다.



"호송(護送)입니다."
"호송이라고?"


양녕은 코웃음을 쳤다.



"이 땅을 다시 밟을 일이 없을 것이다. 경은 돌아가라."
"나루터까지 모시라는 어명입니다."



문귀가 물러서지 않고 따라 붙었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한강 나루터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과 화물이 통행하는 교통의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죄인을 내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강과 임진강을 아우르는 왕도권은 유배처로 이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 기준이 한강이었다. 임금이 살고 있는 강북이 신성한 땅이었다면 강남은 보통의 땅이었다.



양녕 일행이 동대문을 통과했다. 도성을 벗어난 것이다. 세자전을 벗어나고 도성을 벗어나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을 하나씩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성문 밖에는 나뭇짐이 줄지어 있었다. 장작과 가랑잎, 그리고 관솔과 숯이 잔뜩 지워진 지게들이 작대기에 받쳐있고 나무꾼은 없었다.



안암골과 배봉산에서 새벽에 출발한 나무꾼들이 짐이 빨리 팔리면 곧바로 돌아가지만 팔지 못한 나무꾼들은 허기를 채우느라 주막에서 탁배기에 목을 축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짐을 뒤로하고 숭인방을 지날 때였다. 유배행렬을 향하여 버선발로 뛰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2007.10.28 19:29 ⓒ 2007 OhmyNews

능력이 있는 자가 나라를 끌어가야 한다
[태종 이방원 185] 폐위를 인정하지 않은 양녕

행색은 남루했지만 여염집 아낙은 아닌 것 같았다. 단정한 용모에 빈틈없는 자태였다. 하인을 거느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드름 피우는 사대부집 안방마님도 아닌 것 같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여인은 양녕이 타고 가는 말고삐를 붙잡고 말을 세웠다. 갑작스러운 여인의 출현에 행렬이 잠시 혼란이 빠졌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



창을 꼬나쥔 군사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세자는 개성에 있다. 세자는 경덕궁에 있는 충녕이다. 폐 세자 이제를 세자 저하라 부르면 국가에 역심스럽고 불경이다. 당장이라도 의금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양녕 호송을 책임진 원윤이 눈감아 주었다.



울부짖던 여인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양녕은 당황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호송하는 군사들도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돌발 사태를 파악한 군사들이 여인을 밀쳐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렬은 앞으로 나아갔다.



"세자 저하! 부디 평안하시오, 편안하시오."



양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여인은 경순옹주였다. 태조 이성계의 딸이다. 그러니까 태종의 이복동생이며 양녕의 고모였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 삼남매가 있었다. 방번과 방석 그리고 경순옹주다. 방번과 방석이 척살된 무인혁명 때 경순옹주의 남편 이제도 목숨을 잃었다.



태종이 경순옹주를 위로하며 후사를 돌보아 주겠노라 제의했으나 옹주는 거절했다. 지아비와 동생을 죽인 오빠의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보다도 싫었다. 홀로 남은 경순옹주를 불쌍히 여긴 태조 이성계는 손수 머리를 깎아주고 정업원에 들어가라 명했다.



정업원에 기거하던 경순옹주가 태종의 내침을 받고 양녕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잰 걸음으로 뛰어나온 것이었다. 가슴에 사무친 이복오빠에 대한 원한이 양녕을 뜨겁게 배웅하게 한 것이다.



숭인방에 자리 잡고 있는 정업원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오갈 데 없는 궁중여인들의 쉼터였다. 혜화궁주가 선배였고 정순왕후 송씨가 후배가 되었다. 절집도 아니고 사가도 아닌 정업원은 퇴락한 궁중연인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경순옹주는 이곳에서 아버지가 멸망시킨 고려 공민왕 후궁과 동거하는 기이한 인연을 이어갔다.



양녕의 유배행렬이 청계천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훗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던 단종이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던 다리다. 이때부터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 살곶이다리. 전곶교
ⓒ 이정근 전곶교




전관원(篆串院)을 지나 살곶이에 이르렀다. 살곶이에 다리(箭串橋)가 만들어지기 2년 전이다. 징검다리를 건넌 일행은 광나루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양녕을 태우고 갈 나룻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부왕에게 불공(不恭)하였고 상서(上書) 또한 불공하였다. 죄가 심하였으나 죽지 않은 것은 주상의 덕택이니 어떻게 보답하겠는가? 불효(不孝)를 범하였으니 어찌 성상 보기를 기약하겠는가? 경은 개성에 돌아가거든 내 말을 전하라."



문귀와 작별한 양녕은 나룻배에 올랐다. 문귀는 돌아갔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원윤과 최한이 군사들을 이끌고 동승했다. 순풍을 탄 나룻배가 강심을 향하여 미끄러졌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도성은 보이지 않고 야트막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종이 사냥터로 즐겨 찾던 아차산이다.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결사항전하다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던 아차산. 요동 벌판에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신라에게 내주고 멸망한 땅 아차산. 고려가 차지했고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반도의 전략요충지 아차산.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차산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지금 현재 한반도의 주인은 누구인가? 조선이다. 조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백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왕은 군주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부왕 이후 조선의 주인은?'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룻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깎아지른 아차산 절벽에 부딪친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뱃전을 때렸다. 양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이름 모를 물새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고 있었다.



▲ 아차산성 고구려가 축조한 아차산성.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있다.
ⓒ 이정근 개로왕




'요(堯) 임금은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순(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순임금도 상균(商均)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우(禹)라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요순시대(堯舜時代)를 열지 않았는가? 이들의 선양(禪讓)이 왜곡되고 미화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건방지다. 귀양 가는 주제에 감히 요임금과 순임금을 자신과 견주다니 주제파악을 못해도 한참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대망상증 환자 같다. 이래서 정신 이상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해괴망측한 행동으로 부왕의 노여움을 사 귀양 가는지 모르겠다.



양녕은 자신의 폐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씌워진 위(位)를 스스로 넘겨줄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폐위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선위(禪位)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한 자가 역사를 끌어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역사를 끌어간 선각자가 될 것인지 역사를 뒷걸음치게 한 죄인이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아버지 이후 조선의 주인은 분명 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충녕이 주인이 될 것이다. 적장자 계승 원칙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했는지 모르지만 명문화된 법은 아니지 않은가? 부왕의 뇌리에 각인된 장자계승 원칙은 관례였고 신앙이었다. 아버지의 신념을 깨트린 나를 세상 사람들이 불효막심한 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겠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홀가분했다. 아버지가 지워준 무거운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원해서 진 짐이 아니었다. 장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타의에 의해서 진 짐이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뒤따라오던 물새가 응답이라도 하듯이 끼륵거렸다.



양녕 생각, '국가는 능력이 있는 자가 끌어가야 한다'



부왕이 택현(擇賢) 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준 양녕은 물 위에 떠 있다. 양녕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물은 흐르고 있다. 폐위도 유배령도 모두 흘러간 물이다.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역사로 남는다. 정치와 통치에 쓰이는 치(治)라는 글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는 능력이 있는 자가 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양녕의 생각이었다. 자신처럼 풍류 좋아하는 자가 용상에 앉아 있으면 후궁이 많아지고, 후궁이 많아지면 인척들이 발호하여 파당이 생기고, 파당이 생기면 국론이 분열된다고 생각했다. 명나라의 발톱아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게 국론분열은 망국의 길이라는 것이 양녕의 지론이었다.



능력이 없는 자가 위(位)에 앉아 있을 때 국가는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고달퍼진다는 것이 양녕의 생각이었다. 양녕의 이러한 생각은 훗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등극했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묵시적인 지지를 보낸 것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장자 혈통은 생물학적인 퇴화를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다. 적장자 대통이 왕조의 쇠퇴를 가져올까봐 양녕 스스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면 단일 왕조로서 500년 이상 조선왕국을 유지해온 이씨들에겐 축복이 아니었을까?



이제 공은 태종에게 넘어갔다. 양녕이 벗어던진 짐을 충녕이 지고 있다. 태종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노기에서 비롯된 우매한 계책이었는지 미래가 판가름한다. 충녕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배가 어느덧 섬말에 닿았다. 나룻배에서 내린 일행은 우묵골을 지나 유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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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해피코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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